In a Korean proverb, there is a saying, “A big pot cannot fit into a small pot.” Surprisingly, this simple Korean proverb has given me a lot of comfort. It has provided me with wisdom to overcome the pain, sorrow, and turmoil that I, as a minority, experienced in the majority society. Furthermore, this experience... Continue Reading →
Faith Beyond Failure
For humans, failure is unavoidable. Failure can come from human limits, mistakes, or even sin. It is the same for Christians. However, there is a big difference regarding failure between those with faith and those without. What makes the difference? It is not that failure happens because it happens to all people. The story of...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17-20 율법의 완성 (2/2)
17 “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abolish them but to fulfill them. 18 For truly, I say to you, until heaven and earth pass away, not an iota, not a dot, will pass from the Law until all is accomplished. 19...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17-20 율법의 완성 (1/2-영어해설)
17 “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abolish them but to fulfill them. 18 For truly, I say to you, until heaven and earth pass away, not an iota, not a dot, will pass from the Law until all is accomplished. 19...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16 빛을 비추라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others, so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ive glory to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In the same way는 마찬가지로 즉, likewise의 의미다. Let your light shine before others는 주어가 없는 명령문이다. 물론 의미상의 주어는 ‘너희’ 즉, 2인칭 단수 혹은 복수가 가능한데, 문맥에서 제자들을 향햐 하는 말이므로 2인칭 복수이다. Let은 목적어와 목적보어를 취하는 동사이다. 의미는 ‘목적어’에게 ‘목적보어’를 하도록 시키다 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 문장은, ‘너희의 빛이 다른 사람들 앞에 빛나게 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목적어’에게 ‘목적보어’하도록 ‘시킨다’ 혹은 ‘만든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는 let 외에 have와 make가 있다. 물론 have와 make는 이 외에도 여러가지 다른 의미로 쓰이므로 문장과 문맥을 보고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하도록 시키다’ 혹은 ‘~하게 만들다’의 의미로 사용되는 문장을 예로 들면, Please, have him call me. 그분에게 저에게 전화를 하라고해주세요. Did you have your hair cut? 머리 깎았습니까? Please,... Continue Reading →
An Aspect of Righteousness
No one can go into heaven without proper righteousness, as the Lord clearly says in Matthew 5:20, "For I tell you, unless your righteousness exceeds that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So then, it is essential to know what proper righteousness is. There is an aspect we...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14-15 너희는 세상의 빛
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set on a hill cannot be hidden. 15 Nor do peopl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asket, but on a stand, and it gives light to all in the house.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기본문장은 you are the light 이고 of the...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salt has lost its taste, how shall its saltiness be restored?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 people’s feet. 첫 문장은 세 개의 기본문장이 연결되어 있다. 두번째 문장과 세번째 문장은 if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다. Has lost는...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11-12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
5:11 “Blessed are you when others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utter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falsely on my account. 12 Rejoice and be glad, for your reward is great in heaven, for so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Blessed are you when others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10 핍박을 받는 자
5:10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Who are persecuted는 관계대명사 절로서 선행사 those를 수식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관계대명사절도 절이므로 그 안에 기본 문장이 있다. 관계대명사가 이끄는 문장인 관계대명사절과 주된 문장은 관계대명사로 연결된다. 관계대명사가 접속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관계대명사가 접속사와 다른 점은 관계대명사는 관계대명사절의...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9 화평케 하는 자
5: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Peacemakers는 화평을 만드는 자들이란 의미다. 그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리워진다는 것은 인정받는다는 의미다. 이 인정은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들에게서도 받겠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이 문장은 수동태 문장이다. 이 문장의 능동태 문장은 무엇일까? Sons of God은 능동태 문장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이를 보기 위해 능동태 문장을 God을 주어로 해서 만들어 보면, God will call them sons of God. 제3자의 의지를 나타내는 shall을 주어의 의지를 나타내는 will로 바꾸고, 수동태의 주어 they는 능동문에서는 call이라는 타동사의 목적어이므로 them이 된다. 그러면 sons of God은 이 문장에서 무엇인가? 목적어 them에 대해 보충해서 설명을 주는 보어이다. 이런 보어를 목적어를 보충설명해 준다고 해서 목적격 보어라고 한다. 주어 동사 목적어 목적격 보어로 이루어진 문장을 흔히 5형식 문장이라고 한다. 이 5형식 문장을 수동태로 만들때, 목적어는 주어로 되고 주어는 by와 함께 행위자를 나타내도록 해 주면 된다. 그런데, 목적격 보어는? 이 경우에는 그대로 써 주면 된다. 목적격 보어를 동사로 취하는 동사들, 예를 들면, 지각동사나 사역동사 등이 있는데, 이들의 수동태는 굳이 호기심 이상의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같다. 쓸 일도 거의 없거니와 앞서 말한대로 쓰지 않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왜 화평을 이루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일까? 먼저, 이 세상 사는 동안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인정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흔히 누구누구의 자녀야 라고 하는 것은, 그의 영광 혹은 수치의 원인을 그 부모로부터 찾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영광인 경우는 그 부모가 영광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라고 인정해 줌으로서 그 자녀에게도 더욱 영광을 주는 것이고, 수치인 경우에는 그 반대로 더욱 수치를 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부모의 얼굴에 먹칠하지 말라”는 우리 격언은 이런 심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어법은 부모가 영광스러운 사람들인가 수치스러운 사람들인가가 이미 알려져 있는 경우에 사용된다. 그 부모에 대해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경우에 이런 말은 뜸금없게 느껴진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고, 나아가 구세주이시다. 어떤 사람이 그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을 받는 것이 얼마만한 영광으로 여겨졌을 지를 생각해 보라. 즉, 하나님의 자녀라 인정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어떤 영광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것이다. 우주만물 중에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낳으신 아들의 영광을 보면 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14 참조).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화를 내기 시작한 이유들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18). 화평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화평을 이루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을 주신다는 것인가? 먼저,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는 것을 두고 생각해 보자. 우리 주변에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서로 갈등 중에 있는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화합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기 위해 쓰는 마음이 얼마나 귀중한가? 나아가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을 경우, 갈등을 해결하고 화합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 심지어,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신의 감정까지도 희생하면서, 상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가? ‘우리 그룹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가? 그런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그만큼 귀중하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는 영광을 주시겠는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한 사람을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하는 것은 …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다. 이 화평의 일을 위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화평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온 삶을 하나님께 바치고, 단 한 영혼이라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오는 모진 고난과 수난을 감내했다. 사도 바울이 받은 수난을 묘사한 고린도후서의 글은 언제나 코끗이 찡해옴이 없이 읽을 수 없다 (고린도후서 6:3-10, 11:23-33). 이 고난에 찬 삶으로 사도 바울을 부르신 것은 바로 주님이시고 그 주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당신의 사도가 참혹한 고난 가운데 살게 하신 이유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와 같이 구원받은 사람들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조: 로마서 10:14-15; 고린도후서 5:18-20).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갈망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같은 그런 하나님의 종들에게 어떤 영광스러운 호칭인들 아끼시겠는가? 영광 중에 최고의 영광,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는 영광이 아니겠는가?
Can Love Be Mutual?
In 2013 when I was in school, I had a debate with a professor about the mutuality of Christian love. Then, I argued that Christian love is not mutual. I said that the Bible never taught that Christian love should be mutual. I argued that we Christians must love others unconditionally. I believed so firmly...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8 마음이 정결한 자
5: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영어해설 The pure는 pure people을 의미한다. 그런데, pure에 in heart라는 부사어가 있어서 그 의미를 한정한다. 흔히 부사어는 동사, 형용사, 부사 등을 수식한다고 하는데 수식이라는 말은 그 의미를 한정한다는 의미다. 의미를 한정한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다 구체화한다는 의미다. 영어로는 이런 역할을 하는 문장의 요소를 modifier라고 하는데, 그 의미를 적당하게 조정해 준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여기 pure in heart에서도 이와 같이 in heart 즉, ‘마음에 관하여’라는 의미의 부사어는 pure의 범위를 한정해서 말하는 사람이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알게 해 준다. 예수님은 마음의 순수함, 순결함, 정결함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마음이 순수하고, 순결하고, 정결한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문장 역시 두 개의 문장이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for로 연결된 한 문장인데, 앞서 본 바와 같이 복이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거나 혹은 뵐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해설 마음이 순수하고, 순결하고, 정결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기에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거나 뵐 것이라고 하는가? 또 하나님을 만나거나 뵈는 것이 왜 복인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보면 좋겠다. 하나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떠난 다음이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없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환상 혹은 신비한 체험을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을 설령 만났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 가르치는 삶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만남이 설령 진짜 있었다 하더라도, 그 만남이 그 사람에게 복을 갖다 주지는 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날 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삶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따라서, 말로써 주장할 일이 아니라, 변화된 삶으로써 자연스럽게 증거되어야 한다 (참조: 예레미아 9:24).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 특히 교회에 대한 충성이 강한 사람일 수록, “은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들의 인생의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들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맞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삶의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시고 때에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그렇게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볼 때 은혜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왜 그 사람에게 인격이 성숙해지는 은혜는 주지 않았을까?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으로 자라고, 성숙해져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라고 하는데, 왜 그들은 그렇게 되지 못한 걸까? 그렇다면 그들이 받았다는 은혜는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까, 아니면 세상적인 수단이 갖다준 작은 성공들을 하나님 은혜로 미화하는 것일까? 만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면, 이것 또한 말로 주장할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매일 매순간의 삶에서 은혜가 느껴짐으로써 증거될 일이다. 이 세상을 떠난 후에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영원한 구원 즉 천국에 가게 된 것을 의미함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갈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구원의 연장선이지 갑작스레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예외를 기대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만큼 무모한 일이 있을까? 그래서 성경은, 아니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참조: 예레미아 29:13). 그런데, 왜 하나님을 만나려면 마음이 순수하고 정결해야 할까?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그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향해 순수하고 정결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마음은 순수하고 정결하다고 할 수 없다. 결혼 상대를 구하는데 외모로 판단을 하거나 조건으로 판단하는 것을 순수하다고 할 수 없다. 결혼의 본래의 목적에 가장 충실한 것이 순수한 것이고 정결한 것이다. 즉 사랑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본래의 목적에 가장 충실한 것이 순수한 것이고 정결한 것이다. 이 또한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을 온 마음과 힘과 혼과 영을 다해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 자신의 세상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것을 순수하다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세상적인 것을 원하는 것을 다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적인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라 — divine reversal!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신다. 솔로몬에게 지혜는 물론 부귀와 영화를 주신 과정을 보라 (열왕기상 3:3-14).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40년 동안 행진하며 배워야만 했다 (민수기 13:6-10, 20-35).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도리는 하나님을 순결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마태복음 22:37-38).
What If …
A lady called me and told me a sad thing that had happened to her recently. She suffered a lot from physical, verbal, and mental domestic violence. By the last violence of her husband, she got two broken ribs and a thick bruise on half of her face. She said she decided to divorce her...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7 – 자비로운 자는 …
5: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receive mercy. 영어해설 The merciful은 merciful people이다. Merciful은 자비롭다는 의미. 자비로운 사람들은 복이있는데, 그 복은 그들이 자비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영어는 그리 어려운 것이 없지만, 여기서 보고 넘어갈 것이 있다. /s/발음이다. 영어의 이 발음은 한국어 원어민에게 그리 어려운 발음이 아니지만 거기에 함정이 있을 수 있다. 우리말의 ‘ㅅ’과는... Continue Reading →
True Faith In Jesus
Twenty years ago, when I began seeking faith, I wrote the church's Senior Pastor a letter asking: "What is faith?" Unfortunately, he didn't respond to the letter. But he might have answered my question in his sermons and teachings. I still ask the question to myself sometimes. Some people quote Hebrews 1:1 as if it...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6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5: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satisfied. Hunger는 배고파하다, thirst는 목말라하다는 의미다. 베고픔이나 목마름의 대상은 for로 나타낸다. 의를 배고파하고 목말라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역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for로 앞 뒤 두 문장이 연결되어 있다. 복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만족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Shall은 역시 하나님이라는 제3자의 의지를 나타낸다. Satisfy는 만족시키다, 만족을 주다는 의미의 동사인데, 무엇인가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므로 무엇을에 해당하는 목적어를 취하는 타동사이다. 타동사라고 하는 이유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 즉, 대상인 목적어에 어떤 영향을 준다는 의미다. 즉 다른 대상에 대하여 주어가 행하는 동작을 나타낸다. They shall be satisfied. 이 문장은 수동태 즉, passive voice이다. 수동태란 타동사의 동작의 대상이 되는 목적어를 주어로 사용해서 작성한 문장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족시켜 주실 것이다’라는 문장은 God will satisfy them이다. 여기서 satisfy는 타동사, them은 동사의 목적어이고, God은 주어이며, will은 주어의 의지를 나타내는 조동사이다. 이 문장을 목적어인 them을 주어로 바꾸려면, 목적격인 them은 주격인 they가 되고, will은 주어의 의지를 나타내므로, 제3자의 의지를 나타내는 shall로 바뀌고, satisfy는 수동태인 be satisfied로 된다. 능동문의 주어인 God은 행위를 행하는 자를 나타내는 전치사 by를 써서 by God이 된다. 그래서, 수동태 문장은 They shall be satisfied by God이 된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by God은 생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수동태의 문장은 쓰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수동태 문장은,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나아가서, 행동의 주체가 주어가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불분명하다. 글을 읽거나 말을 듣는 사람은 글이나 말에 확신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특히, 한국어에는 수동태와 같은 형식을 띠는 문장들이 많으므로, 영어로 작문을 할 때에는 수동태의 의미를 가진 우리 말을 그대로 직역하기 보다 주어나 동사를 바꾸어 능동태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면, “내 눈에 그렇게 보였어요 (들렸어요)”라는 말은 수동태의 의미다. 그래서, 이말을 직역하면, “It was seen (sounded) like that to my eyes (ears)”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동사를 바꾸면 능동태로 쓸 수 있고 문장이 자연스러워 진다. 즉, “It...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5 – 온유한 자 …
5: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영어해설 The + 형용사는 복수 명사라는 것은 5장 3절에서 이미 보았다. 따라서 the meek은 meek people이다. 일단은, 온순하다, 온유하다 등으로 해석하자. 이 문장 역시 두 개의 문장이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for는 이유를 나타내는 부사적 접속사다. 온유한 사람들이 왜 복이 있는가 이유를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Inherit은 상속하다는 뜻의 동사이다. 한국 성경들은 상속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기업 혹은 기업으로 받다는 표현을 쓴다. Shall은 말하는 사람이나 제3자의 의지에 의해 ‘그렇게 되어야 한다’ 혹은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주어의 의지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다. 주어의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will을 쓴다. 여기서, shall이 쓰인 이유는 하나님이라는 제3자의 뜻에 의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성경해설 이제, 성경의 의미를 들여다 보자. 이 구절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meet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Meek은 자기 자신의 몸 이외에 땅, 재산 등 생존을 위한 수단을 전혀 갖지 못한 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생존 수단을 공급해 주는 사람 혹은 존재에 대한 태도를 표현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주는 존재에게 감사하여 고분고분하고 양순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표현하는 말이었다. 성경이 단 한 번도 이 말을 하나님에 대해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어원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거짓된 태도는 포함되지 않는다. 다시말하면, 마지 못해서 온순하고 온유하고 순종하는 체하는 태도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어원에서 겸손하고 순종적이라는 의미로 확대발전되었다. 겸손과 순종은 기본적으로 종의 주인에 대한 태도이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적용하면, 우리 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해 나 자신을 복종시켜 종으로써 위치지우고, 나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의로서의 태도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 가르치는 크리스챤의 삶의 도리와 태도를 말한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산상설교가 가장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친 성경이다. 그뿐 아니라 다른 모든 신약성경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구약 성경들도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Meek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전혀 갖지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태도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지구, 즉 온 땅을 다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과거 농경시대 뿐 아니라 현대에도 땅은 모든 생존 수단 중에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다. 특히, 땅은 물론 아무런 생존을 위한 수단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원을 통해서 그 수단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그들의 귀를 번쩍뜨이게 하기에 충분한 놀라운 약속의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세상의 땅보다 더 영원하고 존귀한 영적인 땅을 말함은 물론이다. 땅은 세상을 의미하고 세상은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가득 채워야 할 하나님의 일의 터전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영적인 일을 하시기 위해 오셨다. 즉,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인간들에게 그 뜻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인 사랑을 통한 구원을 이루시고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기꺼이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그 일 보다 더 크고 귀중하고 영원한 가치를 가지는 일은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일은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 모진 핍박과 험한 고초를 다 겪으시고, 단 한 마디도 반항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그들의 잔인한 손에 돌아가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이 태도가 바로 meek의 결정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스스로에 대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11:29). 여기서 온유함이 meek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최고로 meek하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가장 큰 일을 맡기신 것이다. 그 일도 이 구절에서 말하는 땅이 비유하는 것임은 당연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악한 자들로부터 억압받고 핍박을 당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영적인 세상을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세상의 이치나 처지와 영적인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이치와 처지는 반대이다. 세상에서 보이는 것과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이렇게 반대된다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영어로는 divine reversal이라고 한다.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사건이 앞서 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죄인들의 손에 무기력하게 돌아가신 것 같지만, 그것이 모든 인간의 구원의 완성이요, 하나님의 사탄에 대한 완벽한 승리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의 예는 마태복음 20장 25-28절에 나타난 섬기는 리더쉽이다. 영원한 세계 즉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온유하고, 겸손하고, 순종하는 자들이다. 억압, 핍박, 심지어 거짓으로 모함하고 모략하는 것까지 믿음으로 이겨내는 것이 온유함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행하는 것이 순종이고,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겸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마음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버려서는 안 되는 태도이다. 세상은 다른 사람들 위에 서서 권력을 행사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성공이라고 믿도록 가르친다. 그 성공을 하라고 부추기고 그것을 성공이라고 믿고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오만불손하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가는 것이 진정한 성공인데, 그것은 어떤 위치에서도 겸손하고 종의 태도를 가지고 섬기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영적인 성공이다. 설사 세상에서 부귀와 권력을 갖게 되더라도 그런 것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않아야 한다. 이 우주 만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세상의 부는 하나님이 주신 섬김의 수단으로 여기고 그에 맞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재물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 진정으로 복있는 사람이다 (마태복음 5:3). 진정한 성공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를 통한 성공이다. 즉 예수님의 죽음을 본받는 마음과 태도를 갖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도, 하나님 앞에 국민 앞에 무릎꿇고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이다. 이 또한 divine reversal의 이치다.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고, 얼마나 가치있는 삶인가? 이 세상의 가장 부자가 그가 가진 모든 돈을 들여서도 살 수 없는 성공이 바로 이 성공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사람은 온 땅을 받을 만큼 복되다고 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5:4 – 애통하는 자 …
5: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이 문장도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for로 연결된 두 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문장이다. Blessed are those who mourn역시 be동사의 주어와 보어의 위치를 바꾸어 blessed를 강조하고 있다. 주어는 이번에는 those라는 지시대명사인데 that의 복수다. 여기서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Who mourn은 하나의 완전한 문장이다. 즉, 하나의 기본문장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blessed are those라는 기본문장과 who mourn이라는 기본문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문장이다. 그러면 접속사는 무엇인가? 이 문장에서 접속사의 역할을 해 준 것은 관계대명사다. 관계대명사는 문장과 문장을 연결해 주는 것은 접속사와 같은데, 특이한 점은 관계대명사 문장은 대부분 꾸며주는 역할을 한다. 이는 마치 형용사가 동사를 꾸며 주는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이 문장에서도 those라는 불특정한 지시대명사를 꾸며주는 역할을 한다. 즉, 그들은 그들인데, 애통해 하는 그들이다. 이렇게 관계대명사는, 특수한 용법도 있지만, 보통은 문장의 앞에 나온 단어를 꾸며주는 역할을 한다.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는 앞에 나온 단어를 선행사라고 한다. 관계대명사는 선행사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사람이면 who (주어를 대신할 때)/whom (목적어를 대신할 때), 사람 이외의 것은 which (주격 목적격 같음)를 사용한다. That은 선행사가 사람일 때나 사람 이외의 것일 때 모두 사용할 수 있지만 문맥을 파악해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 관계대명사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본문에서와 같이 문장 속에 앞서 나온 어떤 단어를 설명함으로써 그 해당 범위를 한정하거나, 그 단어의 특성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I love a woman이라는 말을 하면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여기에 관계대명사를 붙여 그 의미를 한정해서, I love a woman, who married me twenty six years ago라고 하면 단 한 사람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오해를 막을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Do you know the man, who is speaking now? 누구를 말하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지금 말하고 있는’ 이라는 설명을 더해 준 경우다. 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예수님이 천명하실까? 3절에서와 같은 논리적 구조로 본다면, 애통해야 그 복을 받는 것이다. 즉, 그 복을 받으려면 애통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애통하는 것은 무엇이고 왜 애통해야만 복을 받을까를 생각해 보자. 애통한다는 것은 누군가 죽었을 때 곡을 할 정도로 슬퍼하는 것이다. 죽음과 같은 슬픈 일이 일어났음이 전제되어 있다. 누가 죽은 것일까? 바로 나다. 하나님 앞에 내가 죽은 것과 같이 애통하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해 하나님과 동떨어져 있었다. 이제 하나님을 알고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오려면 (3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던 죄값을 치러야 한다. 죄값은 죽음이다. 물론, 영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즉, 영적으로 죄인이었던 내가 죽어야 한다. 그러나, 애통하는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보자면, 죄값으로 인한 영적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뻐할 일이다 (누가복음 15:7,...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3 – 심령이 가난한 자는 …
5: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이 문장도 두 개의 문장이,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 for로 연결되어 있다. 즉, 뒤의 문장은 앞의 문장의 이유를 나타내는 문장이다. 먼저, 앞 문장의 기본문장은 무엇인가? Be동사 are가 있으므로 “주어 + be동사 + 보어”로 이루어진 문장일 것이다. 주어는 the poor이다. 정관사 다음에 형용사를 쓰면 ~한 사람들이라는 복수명사의 의미를 갖게 된다. The 형용사 (어떠하다) = 어떠한 사람들. 예: the poor = poor people, the wealthy = wealthy people 보어는 본래 보어를 필요로 하는 동사 다음에 나오는데, 이 경우는 주어와 보어의 위치가 바뀌었다. 이렇게 문장 속에서 보통의 어순을 따르지 않고 특별한 순서를 사용하는 이유는 강조하기 위해서다. 즉, 보어인 blessed를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문장 속 어순을 바꾼 것이다. 우리 말로 얘를 들자면, “아름답도다 푸른 하늘이여”도 본래의 말의 순서를 바꾸어 앞에 나온 말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따라서 이런 문장들은, 보통의 글이나 말이 아니라, 문학작품이나 연극 대사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문장도 설교에 쓰인 문장이므로 그런 문장의 순서를 쓴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성경 원어에 충실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개역한글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번역했다. 즉, 한글 성경들은 이 강조를 표현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번역에 있어서 보통의 어순을 택한 것이다. 만일 이 강조를 위한 어순을 택해서 번역을 해보자면,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여.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로다” 쯤으로 했으면 되었을 것 같다. 물론, 영어성경도 성경의 그리스어를 번역한 것이므로, 그리스어의 어순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영어 문장은 그리스어와 어순이 같지만. 어순이 달라지는 것은 번역의 어려움이기도 하고 또 한계이기도 하다. 참고로, 번역은, 통역도 마찬가지지만, 두 가지 중점이 있다. 하나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원어를 문자적으로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는 방법이다. 종교의 경전들, 법률들, 혹은 국가 정상들 간의 회의록, 성명서 등과 같이, 번역 혹은 통역하는 사람들이 판단한 의미로 번역이나 통역을 하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들에는 본래의 문장의 문자적인 의미를 최대한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판단은 그 번역이나 통역을 읽거나 듣는 사람들의 몫이다. 원어를 최대한 문자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formal equivalence를 찾는 방식이고,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functional equivalence를 찾는 방식이다. 우리말로 하자면, 전자를 직역, 후자를 의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같다. 모든 번역이나 통역은 완전한 직역과 완전한 의역 사이의 어느 중간 지점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즉, 완전한 직역도 완전한 의역도 이상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The poor in spirit 주어는 가난한 자들인데, 그냥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심령이”도 앞서 말한 의역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직역에 가깝게 해 보자면, ‘영에 있어서’라고 할 수 있겠다. ‘영에 있어서’ 즉, 그 사람의 영을 판단해 볼 때, 가난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영적으로가난한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후에 곧 보겠지만, 이런 사람이 천국에 갈 사람이다. 천국에 갈 사람이라면, 영적으로 빈약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사람은 스스로는 영적으로 가난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영적인 것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영적인 자산이 하나도 없어서 오직 하나님께 모두 기대는 사람이다. 영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세상적으로는 부자일 수 있다. 물질적으로는 부자이든 가난하든 상관없이, 영적으로 하나님께 기대고 의지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자신이 가진 부에 의지하는 부자들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가엾은 사람이다. 돈이나 권력이나 학력이나 자기자신이나 무엇이든 하나님이 아닌 세상적인 수단에 기대려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마태복음19장 16절 이하에 소개된 부자청년은 그 부를 아까와 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적으로 불쌍한 사람이었다 (마태복음 19장 22절 참조). 반면에, 전재산이 동전 두닢, 하루 임금의 약 삽십분의 일밖에 없던 과부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었다 (마가복음 12장 43절).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이들과 같이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천국이 속해 있음을 가르쳤다 (마가복음 10장 14절; 참조: 마태복음 18장 4절). 이렇게 보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온전히 의지하는 태도, 바로 하나님 앞에 겸손이다. 예수님께서 천명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이다 (참조: 마태복음 18장 4절). 베드로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했다 (베드로전서 5:5). For theirs is the kingdom... Continue Read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