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

구원에 있어서 믿음 만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로마서 3:28) 그 “믿음의 결국이 곧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9).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도 믿음은 필수불가결합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사랑할 수도, 용서할 수도, 선을 베풀 수도, 자신을 다스리고, 하나님 앞에 신실할 수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없이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성령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39; 갈라디아서 5:5, 22-23).

그런데, 믿는다고 할 때,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로마서 4장 16-17절은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로마서 4장은 창세기 15장 6절에 기록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을 기초로, 구원에 관해 가르치는 성경입니다. 이것만 봐도 아브라함의 믿음이 모든 믿는 자들의 믿음의 표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경에 처음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언급한 창세기 15장을 살펴보겠습니다 (구약 19쪽).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다른 신들을 숭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 24: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며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고(창세기12:1, 15:7), 아버지와 함께 하란에 머물다가 아버지가 죽은 후, 75세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르렀습니다 (창세기 12:1-5).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세가지를 약속하십니다. 첫째는,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둘째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그리고 세째는, “가나안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받은 후 얼마 쯤 시간이 지났을 때,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이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다시 확인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밤하늘의 별을 셀 수 있나 보라”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5:5). 그리고 15장 6절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했는데, 여호와에 대해 무엇을 믿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로마서 4장이 이를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을 보겠습니다 (신약 244쪽). 18절을 통해,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 21절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2잘은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창세기 15장 6절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창세기 15장 6잘의 “여호와”를 믿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21절이 말하듯이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은 약속하신 그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이신 아브라함의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믿음”은,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입니까? 

로마서 4장 19절부터 보면, “[아브라함이]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은 믿음입니다. 남편은 100살이 되어서 몸이 죽은 것 같고, 부인은 90세인 데다가 불임증으로 그때까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창세기 11:30).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자녀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11:11). 사람의 생각에는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는 가능하다고 믿은 것입니다. 18절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임을 믿으면서도 아브라함은, 결코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의심하기는 커녕 오히려 “믿음에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0절).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이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로마서 4장 17절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심을 믿었다고 합니다. “없는 것은 있는 것 같이 부르”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활의 하나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이 끝난 곳에서 새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아브라함이 믿고 확신한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이고,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나아가서, 이 믿음이 없이는 우리는 이 험한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고 했는데 (요한일서 5:4), 세상을 이기게 해 주는 믿음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이 세상 속에서 잠시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한 잠시도 누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의 예를 보면, 이 믿음이 구원의 믿음이고, 세상을 이기는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한 예는 민수기 13-14장에 기록된 10명의 정탐꾼들입니다 (구약 216쪽). 이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노예신분에서 풀려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막 들어가려는 상황입니다. 그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 땅을 탐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의 대표들을 뽑아서 12명의 정탐꾼들을 파송했습니다. 그들이 가 보니, 그 땅은 참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10명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땅을 차지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과정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믿음이 없던 그들은, 그 땅 거민들에 대한 두려움에 빠졌고, 급기야 하나님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10대 재앙을 통해 어떻게 이집트에서 그들을 해방시키셨고, 홍해를 통해서 어떻게 그들을 구원하고 어떻게 이집트 바로와 군병들을 멸망시켜는지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이루신 큰 민족의 바로 그 당사자들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과 불순종에 진노하셔서, 이 당시 20세 이상인 자들은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40년간 광야를 방황하다 다 죽게 하셨습니다.

이 경우를 보면, 아무리 증거가 차고 넘쳐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증거가 있다고 믿고, 없다고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런 증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 커녕, 하나님을 화나게 하고, 결국 멸망합니다. 

신약 성경에도 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없어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 사람들의 얘기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순간 그들 곁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함께 계셨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 4장 35절 이하(신약 59쪽)에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 많은 무리가 나오는 바람에, 배에 앉으셔서 가르치셨습니다. 다 가르치시고 날이 저물 때에 예수님께서 배에 타신 채로, 갈릴리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십니다 (35절). 얼마 만큼 호수 깊이 나아갔을 때에 광풍이 일어나서 물결이 배에 부딛히면서 물이 배에 들어와서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광풍으로 파도가 거센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배의 고물에 누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한 말은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선생님이시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으시나이까” (38절).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명하여 잠잠하라 하시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시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십니다. 

이들에게 없었던 믿음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바다 저편으로 건너 가자” 하시고, 더우기 그 배에 함께 타고 계셨다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과 이적들을 이미 많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직 부활을 보지 못해서 그러지 않았겠느냐고 하실 분도 있는데, 사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증거가 있다고 반드시 믿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그렇게 공포에 휩싸였던 것은,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 즉 “아브라함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는 사실 조차도 믿음이 없었기에 그들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을 비웃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고 계셨듯이,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요한일서 3:24).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없으면, 우리 또한 인생의 광풍과 파도를 만날 때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고난과 환란이 닥칠 때 마음의 평안을 지킬 수 없을 뿐아니라, 심지어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소망이 있으십까? 인생을 걸고 이루고자 하시는 꿈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게는 아브라함에게 처럼 약속을 해 주시지 않았는데 …”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여러분에게 그 소원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소원을 품게 해 주시는 것도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성취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소망이 불가능해 보이십니까?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백세나 되어 그의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오히려 믿음에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라도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9:26). 

“설마 …” 라고 생각되시는 분들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십니까? 그래서,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천지창조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조합되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입니다. 부활은 사람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하고 사람에게는 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종합되어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다 막혀,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의롭다 여김을 받게 하며,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고, 우리가 이 복잡한 세상에서 살면서도 천국의 평안을 누릴 수있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 본 봐와 같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라고 생각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도 그렇습니다. 저도 믿음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어느 누구도 믿음의 싸움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싸움은 죽기까지 멈출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씀을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브라함 보다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더 좋은 상황에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까지 약속을 이루시는 정말 지독하게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의 증거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브라함 보다 더 잘 믿을 수 있는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증거가 없는 아브라함도 그 믿음에 도달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십자가라는 증거가 있는데 우리가 왜 그 믿음에 이르지 못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약속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의 명확한 증거입니다.

나아가서, 그 독생자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그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소망, 소원, 꿈을 이루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을 구원하고, 여러분의 삶을 평안으로 가득 채웁니다.

Leave a comment

Create a website or blog at WordPress.com

U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