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

구원에 있어서 믿음 만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로마서 3:28) 그 “믿음의 결국이 곧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9).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도 믿음은 필수불가결합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Continue Reading →

Grace Next Time, 당신의 선택은?

원글 Author: 벤 호건 Ben Hogan 번역 Interpretation: 장민구 Minku Chang You have a choice to make today. Soon, your life will cross paths with someone who desperately needs you to give them something. It may not make sense at that moment, and it may not even be easy for you to do this for... Continue Reading →

To Those Suffering From Their BEING

In a Korean proverb, there is a saying, “A big pot cannot fit into a small pot.” Surprisingly, this simple Korean proverb has given me a lot of comfort. It has provided me with wisdom to overcome the pain, sorrow, and turmoil that I, as a minority, experienced in the majority society. Furthermore, this experience... Continue Reading →

Faith Beyond Failure

For humans, failure is unavoidable. Failure can come from human limits, mistakes, or even sin. It is the same for Christians. However, there is a big difference regarding failure between those with faith and those without. What makes the difference? It is not that failure happens because it happens to all people. The story of...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16 빛을 비추라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others, so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ive glory to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In the same way는 마찬가지로 즉, likewise의 의미다.  Let your light shine before others는 주어가 없는 명령문이다. 물론 의미상의 주어는 ‘너희’ 즉, 2인칭 단수 혹은 복수가 가능한데, 문맥에서 제자들을 향햐 하는 말이므로 2인칭 복수이다. Let은 목적어와 목적보어를 취하는 동사이다. 의미는 ‘목적어’에게 ‘목적보어’를 하도록 시키다 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 문장은, ‘너희의 빛이 다른 사람들 앞에 빛나게 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목적어’에게 ‘목적보어’하도록 ‘시킨다’ 혹은 ‘만든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는 let 외에 have와 make가 있다. 물론 have와 make는 이 외에도 여러가지 다른 의미로 쓰이므로 문장과 문맥을 보고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하도록 시키다’ 혹은 ‘~하게 만들다’의 의미로 사용되는 문장을 예로 들면, Please, have him call me. 그분에게 저에게 전화를 하라고해주세요. Did you have your hair cut? 머리 깎았습니까? Please,... Continue Reading →

An Aspect of Righteousness

No one can go into heaven without proper righteousness, as the Lord clearly says in Matthew 5:20, "For I tell you, unless your righteousness exceeds that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So then, it is essential to know what proper righteousness is. There is an aspect we...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salt has lost its taste, how shall its saltiness be restored?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 people’s feet. 첫 문장은 세 개의 기본문장이 연결되어 있다. 두번째 문장과 세번째 문장은 if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다. Has lost는...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10 핍박을 받는 자

5:10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Who are persecuted는 관계대명사 절로서 선행사 those를 수식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관계대명사절도  절이므로 그 안에 기본 문장이 있다.  관계대명사가 이끄는 문장인 관계대명사절과 주된 문장은 관계대명사로 연결된다. 관계대명사가 접속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관계대명사가 접속사와 다른 점은 관계대명사는 관계대명사절의...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9 화평케 하는 자

5: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Peacemakers는 화평을 만드는 자들이란 의미다. 그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리워진다는 것은 인정받는다는 의미다. 이 인정은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들에게서도 받겠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이 문장은 수동태 문장이다. 이 문장의 능동태 문장은 무엇일까? Sons of God은 능동태 문장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이를 보기 위해 능동태 문장을 God을 주어로 해서 만들어 보면, God will call them sons of God. 제3자의 의지를 나타내는 shall을 주어의 의지를 나타내는 will로 바꾸고, 수동태의 주어 they는 능동문에서는 call이라는 타동사의 목적어이므로 them이 된다. 그러면 sons of God은 이 문장에서 무엇인가? 목적어 them에 대해 보충해서 설명을 주는 보어이다. 이런 보어를 목적어를 보충설명해 준다고 해서 목적격 보어라고 한다. 주어 동사 목적어 목적격 보어로 이루어진 문장을 흔히 5형식 문장이라고 한다. 이 5형식 문장을 수동태로 만들때, 목적어는 주어로 되고 주어는 by와 함께 행위자를 나타내도록 해 주면 된다. 그런데, 목적격 보어는? 이 경우에는 그대로 써 주면 된다. 목적격 보어를 동사로 취하는 동사들, 예를 들면, 지각동사나 사역동사 등이 있는데, 이들의 수동태는 굳이 호기심 이상의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같다. 쓸 일도 거의 없거니와 앞서 말한대로 쓰지 않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왜 화평을 이루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일까? 먼저, 이 세상 사는 동안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인정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흔히 누구누구의 자녀야 라고 하는 것은, 그의 영광 혹은 수치의 원인을 그 부모로부터 찾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영광인 경우는 그 부모가 영광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라고 인정해 줌으로서 그 자녀에게도 더욱 영광을 주는 것이고, 수치인 경우에는 그 반대로 더욱 수치를 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부모의 얼굴에 먹칠하지 말라”는 우리 격언은 이런 심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어법은 부모가 영광스러운 사람들인가 수치스러운 사람들인가가 이미 알려져 있는 경우에 사용된다. 그 부모에 대해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경우에 이런 말은 뜸금없게 느껴진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고, 나아가 구세주이시다. 어떤 사람이 그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을 받는 것이 얼마만한 영광으로 여겨졌을 지를 생각해 보라. 즉, 하나님의 자녀라 인정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어떤 영광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것이다. 우주만물 중에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낳으신 아들의 영광을 보면 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14 참조).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화를 내기 시작한 이유들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18). 화평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화평을 이루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을 주신다는 것인가? 먼저,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는 것을 두고 생각해 보자. 우리 주변에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서로 갈등 중에 있는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화합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기 위해 쓰는 마음이 얼마나 귀중한가? 나아가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을 경우, 갈등을 해결하고 화합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 심지어,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신의 감정까지도 희생하면서, 상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가? ‘우리 그룹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가? 그런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그만큼 귀중하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는 영광을 주시겠는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한 사람을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하는 것은 …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다. 이 화평의 일을 위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화평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온 삶을 하나님께 바치고, 단 한 영혼이라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오는 모진 고난과 수난을 감내했다. 사도 바울이 받은 수난을 묘사한 고린도후서의 글은 언제나 코끗이 찡해옴이 없이 읽을 수 없다 (고린도후서 6:3-10, 11:23-33). 이 고난에 찬 삶으로 사도 바울을 부르신 것은 바로 주님이시고 그 주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당신의 사도가 참혹한 고난 가운데 살게 하신 이유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와 같이 구원받은 사람들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조: 로마서 10:14-15; 고린도후서 5:18-20).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갈망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같은 그런 하나님의 종들에게 어떤 영광스러운 호칭인들 아끼시겠는가? 영광 중에 최고의 영광,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는 영광이 아니겠는가?

Can Love Be Mutual?

In 2013 when I was in school, I had a debate with a professor about the mutuality of Christian love. Then, I argued that Christian love is not mutual. I said that the Bible never taught that Christian love should be mutual. I argued that we Christians must love others unconditionally. I believed so firmly... Continue Reading →

마태복음 5:8 마음이 정결한 자

5: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영어해설 The pure는 pure people을 의미한다. 그런데, pure에 in heart라는 부사어가 있어서 그 의미를 한정한다. 흔히 부사어는 동사, 형용사, 부사 등을 수식한다고 하는데 수식이라는 말은 그 의미를 한정한다는 의미다. 의미를 한정한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다 구체화한다는 의미다. 영어로는 이런 역할을 하는 문장의 요소를 modifier라고 하는데, 그 의미를 적당하게 조정해 준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여기 pure in heart에서도 이와 같이 in heart 즉, ‘마음에 관하여’라는 의미의 부사어는 pure의 범위를 한정해서 말하는 사람이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알게 해 준다.  예수님은 마음의 순수함, 순결함, 정결함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마음이 순수하고, 순결하고, 정결한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문장 역시 두 개의 문장이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for로 연결된 한 문장인데, 앞서 본 바와 같이 복이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거나 혹은 뵐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해설 마음이 순수하고, 순결하고, 정결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기에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거나 뵐 것이라고 하는가? 또 하나님을 만나거나 뵈는 것이 왜 복인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보면 좋겠다. 하나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떠난 다음이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없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환상 혹은 신비한 체험을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을 설령 만났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 가르치는 삶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만남이 설령 진짜 있었다 하더라도, 그 만남이 그 사람에게 복을 갖다 주지는 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날 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삶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따라서, 말로써 주장할 일이 아니라, 변화된 삶으로써 자연스럽게 증거되어야 한다 (참조: 예레미아 9:24).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 특히 교회에 대한 충성이 강한 사람일 수록, “은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들의 인생의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들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맞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삶의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시고 때에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그렇게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볼 때 은혜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왜 그 사람에게 인격이 성숙해지는 은혜는 주지 않았을까?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으로 자라고, 성숙해져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라고 하는데, 왜 그들은 그렇게 되지 못한 걸까? 그렇다면 그들이 받았다는 은혜는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까, 아니면 세상적인 수단이 갖다준 작은 성공들을 하나님 은혜로 미화하는 것일까? 만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면, 이것 또한 말로 주장할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매일 매순간의 삶에서 은혜가 느껴짐으로써 증거될 일이다.  이 세상을 떠난 후에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영원한 구원 즉 천국에 가게 된 것을 의미함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갈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구원의 연장선이지 갑작스레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예외를 기대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만큼 무모한 일이 있을까? 그래서 성경은, 아니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참조: 예레미아 29:13).  그런데, 왜 하나님을 만나려면 마음이 순수하고 정결해야 할까?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그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향해 순수하고 정결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마음은 순수하고 정결하다고 할 수 없다. 결혼 상대를 구하는데 외모로 판단을 하거나 조건으로 판단하는 것을 순수하다고 할 수 없다. 결혼의 본래의 목적에 가장 충실한 것이 순수한 것이고 정결한 것이다. 즉 사랑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본래의 목적에 가장 충실한 것이 순수한 것이고 정결한 것이다. 이 또한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을 온 마음과 힘과 혼과 영을 다해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 자신의 세상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것을 순수하다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세상적인 것을 원하는 것을 다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적인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라 — divine reversal!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신다. 솔로몬에게 지혜는 물론 부귀와 영화를 주신 과정을 보라 (열왕기상 3:3-14).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40년 동안 행진하며 배워야만 했다 (민수기 13:6-10, 20-35).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도리는 하나님을 순결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마태복음 22: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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