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젊을 때부터 해오던 식당이 있었다. 할머니의 손맛과 오랜 노고를 통해 얻은 소박한 비법 덕분에 인근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단다. 동네에선 제법 큰 편이어서 주방에서 돕는 사람도 몇 있었다. 나이가 드신 후에도 할머니는 주방에서 일을 쉬지 않으셨고, 할아버지는 카운터를 떠나지 않으셨단다. 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두 딸이 식당을 맡아서 하게 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마자 가족처럼 일하던 주방 아주머니 한 분이 갑작스레 그만 두는 바람에 어려움이 더 컸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주방 아주머니가 걸어서 1분도 채 안 되는 같은 골목에 같은 메뉴를 하는 식당을 차리고 들어온 것. 손님이 줄어든 것은 그만두고, 할아버지와 그 남은 가족들은 배신감과 인간에 대한 실망으로 더 힘들었단다.
우리사회의 암묵적 합의
어른들이 하는 말 중에 “머리 검은 짐승”이란 말이 있다.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본성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매우 부정적인 말이다. “은혜를 저버리면 짐승만도 못하다”는 비슷한 의미의 격언이다. “인면수심” 즉, 겉은 사람인데 속은 짐승이라고도 한다. 이들 모두 다 배신적 행위를 강하게 비난하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들은 우리 사회에 암묵적으로 합의된 배신에 대한 강한 반감과 경고다. 이와 맥을 같이하여, 다른 것은 용서해도 배신은 용서하기 힘든 정서가 우리네에게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배신으로부터 받는 상처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기 때문이 아닐까.
선물과 선물을 준 사람
배신이 무엇인가? 속담이 말하듯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문자적인 뜻 넘어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어떤 사람으로 받은 선물을 그 선물을 준 사람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주방 아주머니는, 예를 들자면, 그 할머니로 부터 배운 음식 솜씨를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게 분명하다. 다시 말해, 음식 솜씨만 있으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본래부터 안중에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떼어 나누어 줬는데, 준 그것만 날름 챙기고 그것을 준 사람과 그 사람의 마음은 저버리는 것이 배신이다. 선물만 챙기고 선물을 사들고 온 아빠는 외면해 버리는 철없는 어린 아이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상식과 도리를 벗어난 처사다.
배신의 아픔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지고 치가 떨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절대 그런 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처럼 “배신자는 용서 못해” 라는 말을 자신있게 한다. 좋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봐야할 게 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인간에게 우주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
이 세상을 주신 분이 계신다. 바로 조물주 하나님이시다. 이 우주의 모든 천체들과 지구라는 별과 그리고 지구 위의 산과 강과 바다와 그리고 그 위에 혹은 속에 사는 모든 생물들을 지어주시고 그것들을 누리고 관리하며 살아가도록 인간을 지시고 축복해 주신 분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삶의 터전을 지어주신 분이고 나아가서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도 지으신 분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바다에 있는 것 그 어느 것도 그분의 창조의 선물이 아닌 것이 없고, 그분의 사랑과 지혜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모든 것을 지으신 이유가 인간들이 그것들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창세기1:28; 시편115:16; 이사야45:18).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세상에 그보다 큰 선물은 있을 수 없다.
선물을 섬기는 인간
인간은 그 선물이 없이는 단 한시도 존재할 수 없다. 공기를 들이마시고 땅에 발을 딛고 자연에서 온 음식을 먹고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몸을 입고 산다. 그러나, 고질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들을 모두 지어 주신 분에게 감사하지는 않는다는 것. 감사는 커녕, 그분을 모른다. 설령 듣게 되어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뿐인가. 비아냥거린다, 부정한다, 심지어 욕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큰 선물을 주신 하나님은 저버리고, 그분이 주신 선물들을 섬긴다—자연, 집, 차, 자녀, 심지어 자신들의 몸과 건강까지 …. 그것들을 주신 분만을 제외한 모든 게 그들의 섬김의 대상이다. 어불성설이고, 본말전도이고 어이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엄연한 현실임에랴.
아브라함의 시험
이것을 배신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인가. 성경에 나온 예를 보고 생각해 보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은 하나님이 이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지를 알게 해 준다. 그의 부인 사라는 불임증이었다.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한 그에게 하나님은 축복의 약속을 주시는데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그가 75살 사라가 65살 때, 불임인 사라의 자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다. 그가 100살, 사라가 90살일 때 마침내 그들은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얻었다. 그 이삭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귀했겠는가? 그런데, 이삭이 사춘기쯤이던 어느날 그 아이를 제물로 받치란다. 선물을 주신 하나님이 그 선물을 도로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다. 산 위 제단에서 막 이삭을 잡으려고 칼을 번쩍 치켜 올렸을 때, 하늘에서 목소리가 나와 급히 그를 말리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네 독자 이삭을 내게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나를 두려워 하는 줄을 알았다” (창세기22:12).
질투하시는 하나님
이 성경은 당신을 잘 섬기라고 선물을 주셨는데 당신은 섬기지 않고 그 선물만 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준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질투하는 신이라고 말한다 (출애굽기20:5). 다만, 하나님은 오래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그런 그들이 사리를 분별하고 선물에 먼 눈을 뜨고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보게 되기를. 기다리시되, 그들이 죽을때까지. 그것이 그분의 사랑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 아들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모든 인간을 위해 대신 죽게 하시고 그들이 그 예수의 복음에 순종함으로 당신에게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깊은 상처를 내는 “머리검은 짐승”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을 배신한 사람들을 욕하기에 앞서, 모든 것을 후히 주셨고 또 주시고 계신 하나님에 대해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깊이 자성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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