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2

우리 자신의 사춘기를 닮은 아이들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의 아버지들은 이미 연로하셨고 힘도 기억도 쇄잔해졌다. 어떤 아버지들은 힘을 쓰기는 커녕 말수도 줄어들고 연약한 노인이 되고 말았다. 자신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자신들에게 마치 위대한 지도자 처럼 말하곤 했던 아버지가 그렇게 된 것이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허무하기도 하다. 내가 그렇게 두려워 하고, 나를 그렇게 확신있게 가르치고 훈계하시던 분이 저분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거대하게 느꼈던 그 ‘상대’가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초라한 한 ‘노인’에 불과하게 된 것이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그 앙금이 남아서 서로의 가슴을 찌르기도 하고 마음을 후비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전히 아버지와 자식 사이는 서먹서먹하고 대면대면하다는 사실이다. 그 앙금이 풀어져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도 자식들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내 딸 서영이’ 같은 연속극이나 ‘나의 독재자’ 같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극적인 용서와 화해 혹은 이해를 현실에서는 찾아 보기 쉽지 않다. 그러다 마침내, “죄송해요” 그리고 “사랑해요”라는 말 한 번도 해 보지 못하고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마는 자식들이 많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젊어서의 자신의 아내에 대한 행동이 또 자녀들에 대한 행동이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달리 해결할 방도가 없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 말 한마디로 치유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상처가 아닌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 아버지의 미안하다는 말은 아내나 자식들에게는 자신의 무거운 ‘죄’를 너무나 가볍게 만들어 버리려는 얕은 수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런 경우,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고, 어쨌든 내가 받은 상처를 없앨 수 없다. 그래서 때로 미안하다는 말은 자식의 가슴 속의 응어리를 풀어주기보다는 오히려 더 뭉치게 한다. 즉, 그 말은 근원적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정말 근원적인 해결이 필요한데, 자식의 편에서는, 앞 글에서 말했듯이, 아버지를 용서하고 진심으로 공경하게 되고, 아버지 편에서는 그 자신의 존재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그 해결책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왜 아버지가 문제의 원인이 되었는가? 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어머니를 괴롭히는 자로 비치었는가? 왜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를 존경보다는 두려워 하게 되었는가? 그 모든 배경이 된 것은 바로 아버지가 가정에서 대장 혹은 왕노릇하는 자였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군림하는 자였다. 군림하는 자는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역정을 낸다. 군림하는 자는 군림당하는 자의 아픔을 헤아리지 않는다. 군림하는 자는 군림 당하는 자를 진정으로 존중하지 않는다. 군림하는 자는 아무리 그것이 건설적이어도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군림하는 자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 위력을 사용한다. 그들에게는 때로 폭력도 정당화 된다. 

아버지의 그런 군림은 자식의 가슴 속에 응어리를 남긴다. 그 응어리를 녹여 없애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아버지는 군림을 버리고 이전의 군림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제는 군림하는 가장이 아니라, 섬기는 가장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 가정의 아버지를 리더로 세우신 것은 가족 위에 군림하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으로 죽기까지 섬기라는 뜻이었음을 이해하고 그를 행해야 한다. 회개는 말로써가 아니라 그 존재의 변화, 삶의 변화로 나타나야 한다. 여전히 마음에서 우러나는 섬기는 자의 태도와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서, 미안하다는 말은 회개가 아니다. 사실 미안하다는 말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다만, 회개하는 심정으로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죽도록 섬기는 가장이 되어 가족 모두를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한달 두달만이 아니라, 10년 20년 남은 여생을 일관되게 그렇게 산다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말은 우리의 아버지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는 것. 이제 또 하나의 아버지인 나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아버지들보다는 그래도 우리가 훨씬 더 감사하다. 왜냐하면 그분들보다 먼저 알았으니까, 더 많은 기회가 있기에,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도 달라졌기에. 아버지들이여, 진정한 가장이 되고자 하거든 이 말씀을 기억하자. 그리고 이미 준 상처를 치유하고 자녀들과의 관계를 진정으로 회복하고 싶으면 이 말씀의 가르침대로 여생을 살자: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0: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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