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사람이 이생의 삶을 마친 후에는 천국 아니면 지옥에 가게 된다. 천국에 간 사람이 지옥으로 가는 일이 없듯이, 지옥에 간 사람이 천국으로 가게 되는 일도 없다. 육체의 죽음 후에 길이 정해지는 것은 단 한 번이고 한 번 정해진 길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천국에서의 고통과 슬픔이 없는 행복하기만 한 삶이 영원한 것과 같이, 지옥에서의 고통과 슬픔도 영원하다. 고통과 슬픔이 영원하다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희망이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육체적 죽음 후에 한 번 정해진 영혼의 길은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벗어날 희망이 없다는 의미에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일컬어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부르고 일반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생명이라고 부르듯이, 그냥 죽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둘째 사망, 즉 지옥에 들어갈 사람은 누구인가? 죄인들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는 말과 같이, 죄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럼 모든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따라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자아의식이 형성되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된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죄를 짓게 되지만 그 죄지은 모든 사람들이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 죄를 용서받지 않은 자들이 지옥에 간다. 죄를 씻어낸 사람들, 즉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가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첫째, 죄가 무엇인가이고 둘째, 어떻게 죄사함을 받는가이다.
죄란 무엇인가?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3장10, 23절). 물론 태어나지도 못하고 엄마의 뱃속에서 죽거나, 태어나긴 했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을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는 사람은 죄를 인식할 수 없으므로 죄를 지을 수도 없다. 대부분 사춘기 이전의 어린 아이들에게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는 것도 그들이 범죄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인데, 영적인 죄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죄란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인데 (야고보서 4장17절), 그들은 아직 옳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도 판단력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따라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능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는 말이다.
“죄는 불법이다” (요한일서 3장4절). 여기서 ‘법’이란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말한다. 어겨서 죄가 되는 하나님의 법은 무엇인가?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중요한 세가지만 말해 보자. 첫째,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나아가서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칭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우주를 창조하신 이유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우주의 창조는 인간의 창조와 번성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사야서 45장18절). 그리고 인간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사도행전 17장29절). 여기서 첫번째 죄가 나온다. 그 죄란, 자식인 인간이 아버지인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인정하지도, 존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다. 만일 자식이 자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를 인정하지도, 존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하나님도 마찬가지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인 인간이 자신을 알지 못하고 온갖 악행을 하는 것을 슬퍼하셨고 또 화내하셨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 1장 2-3절). 여러분의 주위를 보라.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아버지로서 인정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 그렇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다.
둘째, 죄는 하나님의 계명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해 주신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심성을 본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닮게 창조되었다 (창세기 1장26-27절). 여기서 이미지란 육체적 모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질을 말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자연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다. 선량한 관리자가 되라는 계명이었다. 하나님의 계명이 있었다는 것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가인은 의롭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반면 아벨은 의롭웠으므로 기뻐하셨다 (히브리서 11장4절). 의롭고 의롭지 못한 기준이 이미 주어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아도 마찬가지로 의로운 사람이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 (창세기 6장8-9절). 아브라함에 이르러 하나님의 계명이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창세기 18장19절에는 이스라엘의 첫 조상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자손들에게 의와 공도 즉, 하나님의 길을 지키도록 가르쳐 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하나님의 창조와 언약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항상 함께 있다. 여기서 두번째 죄가 나온다. 즉,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길을 행하지 않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자. 누가 의를 행하는가? 로마서 3장10절은 탄식하여 말하기를 “의인이 없으되 하나도 없다”고 했다.
세째, 죄는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된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시다. 그분은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 죄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가 명하신 의의 길을 가지 않는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악의 길을 간다. 이 또한 죄다. 마침내, 죄인으로 가득하게 된 인간세상을 바라보시며, 하나님 아버지는 이제 자신이 희생하는 수밖에는 이 배은망덕한 죄많은 자식들을 구원할 길이 없게 된 것을 아신다. 이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 아버지는 조용히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다.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하나님을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한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태어나신 이유는 그들을 죄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낼 길을 열기 위해서다. 이는 마치 자식을 진정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벌을 받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것이다 (요한복음 1장29절). 그 어린 양은 다름 아닌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시다. 자식들의 손에 처참하게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들이 자신들의 죄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한 희생이다. 예수님께서 이 희생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세번째 죄가 나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렇듯 그들을 사랑하여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위 참혹한 죽음으로 희생하셨는데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도 존중하지도 않는 것이다 (히브리서 2장3절). 우리 주위를 보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을 위한 십자가의 희생을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삶을 따르지 않은 모든 자들이 죄인이다.
어떻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가?
이렇듯 죄의식을 가질 수 있는/있었던 모든 인간들이 죄인이다. 따라서 죄사함을 받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지옥에서의 영원한 형벌, 즉 둘째 사망의 덫에 걸려 있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다는 이 사실에서 죄사함이 더 없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죄사함이 없이는 자기의식을 가질 수 있는/있었던 어느 누구도 둘째 사망을 피할 수 없는 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 즉 하나님의 독생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24-27절). 그것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거듭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첫째,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24절).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그분이 주신 모든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믿을 것이다 (12장49절).
둘째,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회개란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죄인의 길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다시말하면 회개란 하나님을 떠나 살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사는 것을 말한다 (사도행전 14장15절; 26장20절). 한 번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서 또 다시 죄를 짓는다면 다시 죄인이 되는 것이다. 천국을 선포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동시에 회개를 촉구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마태복음 4장17절). 진정한 회개, 즉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이 회개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잘 이해하기 바란다. 앞서 죄에 대해 말하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혹은 있었던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고 했다. 죄인은 천국에 갈 수 없다. 죄를 가지고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은 명명백백한 진실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죄사함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왜냐면, 죄사함이 없이는 어떤 죄지은 자도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죄인은, 죄사함을 받지 않는 한, 영원한 지옥 형벌에 들어가야 한다. 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둘째 사망이라고 하고 때로는 그냥 죽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을 앞서 말했었다. 따라서, 죄사함을 받지 못한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래서 죽음의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죽지 않고서는 죄를 씻어내지 못한다 (로마서 7장1절; 히브리서 9장22절). 하지만, 육체적으로 죽으면 그것으로 기회는 영영 없어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죽음과 합하여 세례를 통해 죽기만 하면 된다 (로마서 6장3-4절). 예수님의 죽음과 합하여 죽지 않고서는 죄사함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햐면, 죽어야만이 죄값이 효력을 잃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과 합하여 죽을 때, 또한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죄인으로 삶에 대해 죽고 의의 삶을 살기 위해 새롭게 태어난다 (6장17-18절). 이게 바로 영적인 거듭남이다. 이를 두고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다고 표현한 것이다.
조심해야 할 성경과 다른 가르침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해도 혹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해도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다. 물론 성경에는 그런 비슷한 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생각으로 혹은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본받아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성경 야고보서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말로만 생각으로만 갖는 믿음을 비판하면서, 귀신들도 그렇게 믿는다고 말한다 (2장19절). 다시말하면 그런 믿음은 구원의 믿음이 아니라, 거짓 믿음이라는 말이다 (2장14절).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이다 (1장22절).
그런 사람들이 믿기만 해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말에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첫번째 부류는, 세례를 구원 이후에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닌 무엇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할 때 이미 구원을 받는 것이고 세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미 받은 구원을 알리는 것과 같은 형식적인 의식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 부류는 세례는 구원을 받는 데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의 말을 단 한마디로도 지지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16장 1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는 베드로가 오순절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죄사함을 위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라”고 말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은 “세례는 우리를 구원하는 표”라고 했다. 이밖에도 세례와 구원과를 연결하여 설명하는 성경구절들은 매우 많다.
그런 직접적 연관성을 밝힌 성경 구절 외에도 구원에 있어서 세례의 필요불가결함을 논증한 성경들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3장 5절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가르치시면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해서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 반드시 물이 연관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디도서 3장 5절은 이 물로 씻음, 즉 세례를 통해서 마음과 영이 새롭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새삶을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해 놓았는데, 그 죽음은 같은 저자인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 3-4절에서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과 합하여 죽는 것을 의미한다고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이렇듯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예전의 죄성을 지닌 자신에 대하여 및 세상에 대하여 죽는 죽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죽음이 없이는 죄로부터 풀려 났다고 할 수 없다.
이 외에도 세례가 구원에 필요함은 사도들이 전도를 하면서 반드시 세례를 주었다는 것을 사도행전의 기록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 2장37절 이하; 8장12절; 9장18절; 10장47절; 16장15, 33절; 19장5절). 모든 것을 다 통털어서 가장 중요한 세례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이전의 자신에 대해 죽는 죽음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영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믿는 자의 세례는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통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이를 두고, 단순한 구원을 알리는 선포의식이라고 믿거나 혹은 아무 필요없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과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구원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마태복음 18장5-6절 참조)
맺는 말
복음이 혼탁해졌다. 진리의 복음이 아닌 거짓 복음, 가짜 복음이 판을 치고, 거짓 목자, 가짜 크리스챤, 거짓 교회들이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그들이 쉽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말에 속아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으로 가는 좁을 길을 마다하고 듣기 좋고, 재미있는 길을 따라가고 있다. 그뿐 아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행각을 보면서 염증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다른 종교로 또는 무신론자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상황에 전혀 당황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오직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길을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즐거움, 이익, 편의를 좇아서 거짓과 위선을 행하는 무리들과 함께 할 것인가, 세상에서는 어렵고 힘들고 괴롭고 핍박을 받지만 영생을 위한 길을 갈 것인가 하는 선택은 각자 본인들이 하는 것이다. 너무도 안타깝지만, 그들은 이미 세상의 신이 눈을 어둡게 해서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사랑과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고린도후서 4장4절). 그것이 다름 아닌 저주다.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항상 축복과 저주를 우리 앞에 두시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신명기 28장). 자, 여러 분은 무엇을 택하실 것인가? 진지하게 ‘성경을 통해서’ 생각해 보라, 여러분과 여러분 가족의 영생이 달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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