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body got to do something!” 최근에 본 정글북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꼬마가 자기를 키워준 대장 늑대가 야비한 호랑이에게 당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 의분에 차서 소리 지르며 한 말이다. 그렇다. 어떤 상황은 우리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누구든 무엇이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무엇을 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 많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1987년, 내가 대학 2학년 때였다. 마지막 끝자락이긴 했지만 군사독재 시절이라서 여전히 대학생들을 억압적으로 길들이기 위한 정부의 프로그램들이 존재했다. 그중 하나가 “전방입소”다. 4년제 대학에 다니는 2학년생들을 학년 초에 학교별로 전방 지역으로 옮겨서 군인들에게 직접 훈련을 받게 하는 것이 그 골자였다. 그 학기 교련 수업의 ‘꽃’이었다. 거기서 맞은 점수가 그 학기 교련 점수를 좌우했다. 서울대학은 늘 문제를 일으켰으므로 가장 첫 머리에 보냈다. 그래서 전방은 여전히 추운 4월 말에 가게 되었다. 배치된 부대는 화천의 7사단의 한 대대. 살벌한 곳이었다.
서울대는 민주주의를 위해 군사독재에 대항해 열심히 ‘싸우는’ 학교였다. 따라서, 군사독재의 새뇌 프로그램인 전방입소는 많은 학생들에게 당연히 거부투쟁의 대상이었다. 적지 않은 다른 학교들도 그랬다. 그래서 해마다 그 시절, 즉 4월, 5월이 되면 많은 아픔이 나라 여기 저기에서 생겼다. 서울대는 4월 27일 월요일에 수유리에 집결해서 해당부대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는데, 여학생이 없던 우리과 2학년 42명 정원 중 35 여 명의 동기들은 과감히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대단했다. 일단 입소 준비물을 다 챙겨서, 26일 저녁에 “스페이스” 라는 신림9동 주점에 모여서 저녁을 먹었다. 술도 한 잔씩 하며 많은 노래와 농담 등으로 두려움을 없앤 뒤에, 저녁 9시 경이 되어서 신림2동에 있는 큰방이 있는 어떤 여인숙에 집단투숙을 했다. 다음날 아침 시끌벅적한 소리에 잠을 깼다. 놀랍게도 전투경찰들이 여인숙을 포위하고 우리를 끌어내고 있었다. 여인숙 주인이 신고를 했단다. 우리는 강제로 학교에서 대절한 좌석버스 한대에 실려졌고 그 버스는 곧바로 수유리로 향했다. 그렇게 쉽게 실패로 끝난 것이 허무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더 큰 무엇인가가 나를 그곳으로 가게끔 한 것처럼.
우리 과 처럼, 거부를 했던 다른 공대 과들, 법대, 사회대 등 같은 부대로 들어가는 학생들이 수유리 집결장소에 모였다.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약 500여 교련복의 물결이었다. 먼저 도착한 학과들부터 부대로 들어갔다. 그때 어떻게 부대로 들어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휩싸여 있던 허무한 실패와 무력함에 대한 분노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회대의 성중이(가명)도 보였다. 그 친구는 사실, 거부가 실패하고 부대에 들어갔을 때, 특별한 ‘택’(tactic)을 받았다. 나와 두어 명의 다른 친구들은 그 친구를 보호하고 그 친구가 그 택을 해내도록 돕는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본래도 매우 신중한 친구여서 항상 표정이 그런 것 같았지만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로 눈인사만 나눌 뿐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었다.
성중이가 받은 택은 우리 1년 선배들의 전방입소 거부투쟁과 관련된 것이었다. 1986년 4월 28일, 그해 2학년생들도 여전히 전방입소 거부를 했다. 사실 우리가 한 것은 그 선배들이 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42명 중 35명이 쉽게 거부를 결정할 수 있었던가를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1년 선배들은 그냥 주점에 모여있다가 여인숙으로 가지 않았다. 신림4거리까지 나가서 가두투쟁을 했다. 그러던 중, 이재호 김세진이라는 두 선배가 5층 건물 옥상에 올라가 온몸에 휘발류를 끼얹고 자기 몸에 불을 지른 후 투신하여 즉사하는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그때 나는 신입생이었는데, 온 학교는 충격에 빠졌고, 모든 학과는 수업거부를 했고, 연일 교문싸움과 추모제를 드리는 등 시끄러웠다. 그러던 5월제, 추모제 중 이동수라는 83학번 선배가 또 분신자살을 했고 얼마 뒤 박래전이라는 84 여학생 선배가 한강에 투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로운 서울대학생들이 목숨을 건 반군사독재투쟁을 벌이고 있던 와중에 우리 학번 남학생들의 전방입소 거부가 돌아온 것이었다.
성중이가 받은 그 특별한 택은 5월 28일 화요일 부대 조회시간에 이재호 김세진 열사의 추모식을 거행하는 것이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트럼펫 소리가 멈추자 마자 성중이는 “학우여 오늘은 이재호 김세진 열사의 추모일입니다. 열사들을 추모하며 다같이 묵념합시다!” 하는 것이었다. ‘적’의 심장부, 그것도, 중무장한 그들의 심장부에서 돌발적인 추모식은 매우 긴장되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성중이는 죽을 수도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군대에 가서 소리없이 죽어가는 의로운 젊은이들이 적지 않았다. 소위 의문사다. 성중이의 긴장이 이제 이해가 될 것이다.
부대에 갔다. 첫날은 숙소를 배치하고 각 과를 담당하는 중대장과도 만나고 하는 등 그저 그런 보통의 분위기였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이었다. 1987년 4월 28일. 조회 시간이 되었다. 나는 성중이와 같은 오(row)에 섰다. 그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나도 같이 구호를 외쳐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인들도 이미 그날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었다. 모를리가 없다. 만일 소요가 일어나면 중령인 대대장의 진급에 많은 문제가 생길 것이므로. 현역들과 중대장 소대장 등 장교들이 거의 학생들을 애워싸다시피 했다. 많은 간부들이 학생들 중간 중간에 서 있었다. 치밀한 준비였다. 성중이의 얼굴에는 극에 달한 긴장이 나타났다. 나도 그랬다. “죽을 수도 있다.” 그 택을 주던 선배가 한 말이다. 그때는 그랬다. 한마디로 살벌 그 자체였다. 5공의 끝자락이었으니, 그 독재자들은 단말마적으로 무슨 짓이라도 할 기세였고 실제로 많은 얼토당토 하지 않은 폭압적인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 긴장의 순간이 점점 다가왔다. 국기에 대한 경례 음악은 유유히 흘렀고, 너무 짧았다. 트럼펫 소리가 멈췄다. 이제 한 목소리가 짧은 정적을 깨고 새벽 운동장에 울릴 순간이었다. 조용히 몇 열 옆에 서 있는 성중이를 살폈다. 아무 외침도 울려나오지 않았다. 성중이는 고개를 숙인채 서 있기만 했다. 이때, 나의 머리를 강타하는 강한 소리가 있었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 이대로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처절하게 싸우다 가신 두 열사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죽는 한이 있어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성중이의 숙인 고개를 본 순간에 떠오른 만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군가가 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택을 받은 다른 친구들도 있었지만, 연병장 아무 곳에서도—약 500명 중 어느 누구도 그 순간에 아무런 액션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했다.
“학우여, 오늘은 이재호 김세진 열사의 추모일입니다. 열사들을 ….” 순간이었다. “뭐야, 잡아!” 하는 마이크를 통해 나오는 고함소리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장교들과 하사관들이 나를 덮쳤다. 나는 수많은 건장한 젊은 군인들의 밑에 깔렸고, “… 추모하기 위해 묵념을 합시다. 일동 묵념!” 하는 짧은 말조차 맺지를 못했다. 다행히 기절은 하지 않았다. 내 사지를 잡아 들어올린 장교와 하사관들을 다른 장교들과 하사관들과 현역들이 둘러싸고 어디론가 옮겼다. 옮겨진 곳은 어느 어둑어둑한 막사. 멀리 학생들의 구호 소리와 민중가요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들은 얘기지만, 내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 용기가 생겨서 본래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었단다. 더구나, 나를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으로 데려갔기 때문에–그들도 그렇게 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공포를 가지고 있었기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더 강력하게 시위를 했었을 것이다. 동기들의 소리를 멀리 들으며,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잔뜩 겁에 질려 있는데, 다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 때 대대장이 전투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사실 그 때는 그게 전투복인지도 몰랐다. 나중에 내가 군대에 가서 내가 속한 부대의 대대장 당번병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오른쪽 허림춤에 커다란 검은 가죽으로 된 권총집이 보였고, 권총 손잡이 끝이 보였다. 1학년 때 문무대에 갔을 때 진짜 소총은 처음 보고 쏴보기도 했지만, 이런 권총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크고 육중해 보였다.
대대장은 5-6인용 원탁 맞은 편에 앉았다. 그 자세가 자못 거만했다. 무서운 표정을 짐짓 지어 보이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자리에 앉자 마자 아뭇소리도 하지 않은 채, 권총집의 단추를 풀고, 권총을 꺼냈다. ‘왜 저러지?’ 입이 바짝 바짝 말랐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려 애를 썼다. 그는 영화에서 보듯이 권총의 어떤 버튼을 눌러 탄창이 왼손 손바닥 위에 중간 정도 빠져나오게 하더니 다시 집어 넣었다. 장전된 총임을 보여 준 것이다. 권총을 자기 쪽 책상 위에 내려 놨다. 역시 완전 장전된 육중한 권총은 위협적인 비주얼이었다. 나에게 불법적 행동을 하지 않는 선에서 겁을 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점점 목숨을 위협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내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대대장도 그런 살벌한 상황에서도 그런 소리를 질러댄, 보잘 것은 없지만, 나같은 사람이 겁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자네, 내가 자네를 여기서 죽이고 사고처리할 수도 있다는 걸 아나?” 대대장이 한 말이었다. 역시 위협의 의도는 보였지만, 진짜로 어떻게 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알았기 때문이다. 그와 비슷한 이런저런 위협적인 말에도 내가 끄떡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나갔다. 속으로는 겁나 죽는 줄 알았지만. 나는 그제서야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조금 있다가 교련 교관님이 들어왔다. 마음이 약하고 좋은 분이었다. 나에게도 평소에 잘 해 주신 분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을 주동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했다. 못 쓸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게 내가 해야할 모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순순히 써주고 본래 내가 머물러야 할 막사로 돌아왔다.
친구들이 반겨준다. 어떤 친구는 눈물을 글썽인다. 우리과를 담당한 소대장은 나에 대해 뭔가 특별한 지시를 받은 것 같다. 그도 나 보다 대여섯 살밖에 많지 않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니 생각도 조금은 비슷했을 게다. 나는 그 때부터 5월 1일이 지날 때까지 중대장의 찝차를 타고 다니고 장교 식당에서 장교들 틈에서 밥을 먹었다. 노동절에 무엇인가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다른 친구들로부터 분리시킨 것 같았다. 어쨌든 차를 타고 다니니 편하고 재미있었다. 산 중턱에 있는 각개전투 훈련장까지 다른 학생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총을 메고 올라갈 때 찝차를 타고 단숨에 갔다. 훈련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총도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재미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 나름대로 뿌듯했다, 하지 않았다면 영영 부끄러웠을 그 일을 어쨌든 해냈기 때문에. 나중에 알고 보니, 나만 전방입소 점수를 A맞고 우리 과 나머지는 모두 C를 맞았다. 교관님이 각서를 쓰는 조건으로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련과목에 A를 맞았다.
어떤 상황에서는 누군가 무엇인가 해야 한다. 어떤 때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바로 그 사람일 때가 있다.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고 겁이 많더라도, 그럴 때 용기가 필요하다. 성경책 에스더의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표본이다. 에스터가 한 말은 언제나 힘이 있다: “죽으면 죽으리라 (If I die, I will die).” 사실은 그들보다 더 그런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모진 고초를 격고 나아가서 십자가에 못박히시어 목숨을 버리셔야 했다. 그분도 겁이 났고 그 상황을 피하고 싶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희생을 택하셨다. 그분의 그런 용기와 결단이 없었더라면 (없을 수는 없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내가 한 일을 예수님의 희생이나 에스더의 용기에 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한 것은 어쩌면 지혜가 아니라 무모함이요, 용기가 아니라 혈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아무리 무서운 상황이라도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 누군가가 당신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예를 들면, 누군가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의를 행하려 한다면, 당신이 그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용기와 힘을 주실 것이다.
……우리 친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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