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선택은?

잔뜩 긴장한 기색—커피숍으로 들어오는 그분들의 표정에서 내가 느낀 것이다. 새로 개설한 프리 영어강의를 수강신청한 한 가족과의 첫 만남이었다. 개강 전에 그분들이 원하는 것과 그들의 수준을 알아 보기 위해 하는 면담이었다. 한국에서 온 지 한달 여 되었단다. 내가 한시간 남짓 그 남편분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내 아내가 그분의 부인에게 들은 말로는, 미국에 가면 한국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말을 한국에서부터 많이 들어 왔었단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 말을 듣고 그분들의 첫 인상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면서, 씁쓸했다. 다행히 그분들과 우리는 개인적으로 계속 만날 기회가 있어서 신뢰를 쌓아 나갈 수 있어 다행이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 현실에서는,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 사이의 경계심과 불신, 긴장과 불안감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린 것같다. 슬픈 일이다. 한 일본 친구는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임신한 사실 조차 다른 일본인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다 같이 알고 축복해주고 도와주어야 할 일 아닌가? 어떤 방글라데시 아주머니는, 우리와 몇 번 만난 후에 짧은 영어로 이런 말을 아무 거리낌없이 했다: “방글라데시 사람은 나빠.” 이곳 아틀란타에 이사와서 한국분들을 만나다 보니, 우리들도 그 일본인이나 방글라데시인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지는 나름 이해가 간다. 일어났던 사건들, 사실들이 그런 현상을 뒷받침한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안다. 특히, 직접적 인격적 만남을 훨씬 앞질러서 서로를 알게 되는, 인터넷, SNS 등이 발달한 시대의 사이버 문화와도 분명 관련이 있을 터이니 더 더욱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여전히 슬픈 것은 마찬가지다. 왜 서로를 믿지 못하고, 경계하고, 의심하는지…. 깊이 사귀어 알고 보면 대부분 다 좋은 사람들인데 …. 사실 다른 사람을 사기치고 등처먹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할 텐데, 그 극소수 때문에 한인 사회 전체에 불신과 긴장과 경계심이 가득한 것은 뭔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 한인 사회에 팽배해 있는 불신과 긴장과 경계심의 원인을 그런 극소수와 그들이 한 짓들에 원인을 돌리며 당연하다고 생각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합리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 보다는 각자의 선택이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다. 사람은 겪어보기까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처음 보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에 대한 태도는 둘 중 하나다: 의심하거나 믿거나. 피상적으로만 보면 두 선택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큰 차이가 있다. 불신으로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 사회에서 구성원들 사이의 연대는 파괴되고 의심과 불신과 경계가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 살기가 팍팍한 사회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어렵고, 도움을 제시하기도 쉽지 않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판치는 모래알들과 같이 흩어진 사회다.

그러나, 일단 믿고 가까이 해 보려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정신적으로 질적으로 앞에 말한 불신 가득한 사회와 다르다.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웃음지으며 인사를 한다. 쉽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다. 왜냐하면, 순수한 의도의 선행도 사기를 위한 작전으로 보기 일쑤인 불신사회와는 달리, 억울하게 의심받지 않고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쑥떡거림이 사라진다.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고 보다가 조그만 잘못만 발견해도—사실 아무 일도 아니거나 혹은 실수에 불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껀수 하나 물었다’는 듯이 상어이빨을 들어내며 ‘거봐 내가 뭐랬어?’ 하는 식으로 뒷담화를 해대는 인격적장애인들이 설 곳이 사라진다. 그런 자들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게 될 것이고, 따라서 점점 고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극히 개인적인 하나의 선택일 뿐인데, 결국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바로 후자는 사랑과 전자는 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 따르면, 사랑은 믿는 것이다. 사랑이 믿는 것이라고 했을 때, 믿을 만한 것만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믿는 것이라고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믿다가 손해를 볼 지언정 믿는 것이 사랑이다 (고린도전서 6:7b 참조). 손해를 볼까 무서워서든 혹은 손해보고는 못참는 성격이어서든 사람을 불신하는 것은, 죄이거나 죄와 매우 가깝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요한복음 13:34) 하나님 당신이 본질에 있어 사랑이시기(요한일서 4:8, 10)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 즉 죄이기 때문이다. 불신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불신한다고 변명할 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불신과 불신의 말들이 사랑을,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본성을 따라 창조하신 인간의 본연의 형상을 파괴하는, 즉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임을 알아야 한다.

최근에 인터넷 미팅을 통해 만나 새로 사귀기 시작한 어떤 친구가 말했다—“만난 지 30초 만에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고. 30초 아니라 30일 아니 30개월이라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만나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되는 것이 사람 사이다. 그렇게 알고 나서 객관적인 사실들에 기초한 판단을 통해 계속 만날 지 말 지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 일단은 마음을 열고, 믿는 마음으로 만나 보라. 만나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괜히 의심하면서 스트레스 받으며 귀중한 인생을 낭비할 뿐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며 죄업만 쌓지 말고. 자신이 사기꾼을 만나면 반드시 걸려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분별력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렇게 보면, 한인사회를 사랑으로 가득하게 할 것인가, 불신과 경계로 가득하게 할 것인가는 그 누구의 탓도 아니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선택에 달려있다. 즉, 나로부터 고칠 수 있는 손쉬운 문제다.

(사진출처: https://www.pinterest.com/pin/213146994839056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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