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구원받으셨나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많이 인용한다. 에베소서 2장8절이다. 분명히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다. 또 복음에 순종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많이 말한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8절에 있는 표현이고 로마서 2장8절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요한복음 3:16) 표현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해서 말할 때 아주 자주 사용하는 말들이다. 하지만 그 말들은 한 사람이 구체적으로 무엇으로써 구원을 받는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무엇을 갖게 되어야 구원을 받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직접적 답은 아니라는 말이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 문제에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더 읽기 전에 스스로에게 한 번 질문을 해 보라. 놀랍지 않은가?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조차 자신이 무엇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잘 모른다니.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서 사라져, 자신이 구원으로부터 멀어져도 모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과 마음을 표현한다. 즉,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지 구원받는 그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은혜로”를 ‘공짜로 (for free)’라고 해석하는 신학자들, 설교자들이 어마무시하게 많다. 그 해석은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그 중에 중요한 하나가 오늘 이 글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구원 받는 사람이 가져야 할 것 혹은 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구원받는 사람이 스스로 아무 것도 변화시키거나 자신의 삶에 새로이 갖게 되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는가? 하나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하는 에베소서 2장8절에 조차, 구원을 위해 그 사람이 가져야 할 것이 명백히 표현 되어 있다. 믿음이다. 그 구절은 이렇다. “은혜 안에서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아가고 있다” (그리스어 원전으로부터 저자 번역). 이 말씀도차도 분명히 해 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반론자들은 말하기를 그 믿음조차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다고 한다. 주후 4-5세기부터 줄곧 이어져 오고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즉 공짜로, 구원을 얻었다고 믿고 있는 현실 만큼, 그들의 주장이 카톨릭 개신교 할 것 없이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에 깊숙히 퍼져 있다. 그것은 성경적 주장이 아니다. 만일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한 모든 성경은 모두 틀렸다 (예: 사도행전 16:31). ‘믿으라’라는 명령형의 말은 분명 그 사람 스스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공짜니까 하나님의 임의대로 믿음을 주겠다는 생각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복음에 혹은 진리에 순종한다는 표현도 만만치 않게 많이 오해되고 있다. 그 오해들도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말로만 순종한다고 고백하면 된다고 하고 (예: 죄인의 혹은 회개의 기도—Sinner’s Prayer), 어떤 사람들은 몇몇 성경구절들을 뽑아서 그것들을 행하면 된다고 한다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라’). 어떤 의미로 그런 표현들을 사용하는지는 그들의 교인들의 삶과 그들의 예배를 보면 대략 알 수 있다. 회개의 기도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사람들은 그 기도 후에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할 일 끝이다. 후자도 마찬가지다. 그들 누구에게서도 존재의 변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떤 변화가 있다해도 존재의 변화라고까지 할 수 없는 감정적 혹은 외형적 변화에 불과하다. 그들은 여전히 세상살이에 매몰되어 있고, 여전히 세상적인 것들에 삶의 목표를 두고 있고, 여전히 이전까지 추구하던 세상적인 것들을 그대로 추구한다. 다만 다른 것은, 교회에 전보다 자주 나가는 것, 주여 주여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 등이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 자체, 세계관 및 인생관, 즉 그 존재는 변화하지 않은 것이다. 구원을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변화를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고린도후서 5:17), 세상에 대해, 죄에 대해 죽고 (갈라디아서 5:24; 6:14) 거듭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요한복음 3:5), 나아가서 옛날의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사람이 된다고도 함으로써 (에베소서 4:22-24) 그 존재의 변화를 특히 강조하여 가르치는 성경말씀과는 분명히 상반된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실 때 그 사람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성령도 주시는데 성령을 받은 그것이 바로 존재의 변화라는 것이다. 이 또한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의견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받는 것을 엄청 강조한다. 이 의견도 사람의 자유의지를 부정한다는 면에서 앞서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보는 신학과 같은 맥락이다. 이글의 목적상 자세히 논할 수 는 없고 간단히 반박하자면, 이런 의견들은 예수님의 한 말씀도 넘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로봇과 같이 자기의지가 없는 영혼없는 예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기의지를 가진 그의 백성들을 찾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요한복음 4:23-24).

지금까지 보았듯이, 그런 표현들과 그 표현에 대한 여러 오해들은 무엇으로 구원받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여전히 사람이 변화를 통해 무엇을 가지게 되어야 구원이 이루어지는가 라는 질문은 유효하다. 물론 믿음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믿음이 그 사람의 변화는 아니다. 이글에 필요한 만큼만 간단히 말하자면, 믿음은 그 변화를 만들어내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구원과정에서 만들어 내어져야 하는 존재의 변화 자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것을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그 믿는 것이 되거나 그것을 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요한복음 8:31-32참조). 답을 찾는 것은 오히려 간단하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그 삶으로 보여주시고 가르치신 것이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고초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으로까지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이 바로 그 사랑이다 (로마서 5:8; 요한1서 3:16).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3:34). 요한1서 4장 6절부터를 보면 빼도박도 못하게 분명하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한1서 4:6-21).

이 말씀만으로도 분명한 것은 믿음을 통해서 결국 사랑을 갖게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하나님 은혜를 공짜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또 말하기를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왜 사랑이 더 있어야 하느냐고 따진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으니,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혹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귀신들도 가질 수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야고보서 2:19, 26). 왜냐하면 사랑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든 선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1-3).

그러니 무슨 말을 하리요. 한마디로, 사랑이 없이는 구원은 없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구원의 과정에서 변화되어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믿음만으로 혹은 아무런 변화 없이 공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삶이 또 그분의 계명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 분명해졌다. 그럼 이제는 내가 정말 내 이웃을 내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인가, 내 맘 안에 그리스도가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신 그런 사랑이 살아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내가 진정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사람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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