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은 사람을 어떻게 믿고 사랑해야 할까? 상대방이 나를 배신하면 나도 배신해야 하나? 상대방이 내게 손해를 끼치면 어찌해야 하나? 미국인 형제의 미담이 이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것 같아 소개한다.
그를 만난 것은 약 9년 전이다. 미국에 오기 한 2년 전에, 처음부터 뻐드렁니였던 어금니 하나가 나이가 들면서 칫솔이 잘 닿지 않는 저 깊은 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어떤 할아버지 치과의사가 본래 이빨을 건드려서는 안 좋다며 긁어내고 간단히 떼웠다. 미국에 온 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 무언가를 씹다가 똑 하는 소리와 이빨이 부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어금니가 부러졌던 것. 브라이언이라는 가까운 친구에게 물어서 치과에 갔다. 내가 살던 곳에서 2시간 반 운전해서 가야 하는 조용한 시골이었다.
그렇게 브라더 디튼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빨을 떼우는데 사용한 물질은 아말감이었단다. 아말감은 인체에 좋지 않은 수은을 함유하고 있어 미국에서는 사용이 금지된 물질이란다. 그 수은 성분이 이빨을 삭게 만들었던 것. 남은 이빨을 이용해서 크라운을 씌워 주었다. 이빨을 좀 갈아내고 본래 어금니 모양을 만들어 씌운다고 해서 크라운이라고 한단다. 800불 정도가 드는 것이었는데, 이래 저래 300불 정도만 받았다. 내가 전도 사역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브라이언에게 들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몇 일 안 가서 다시 똑 하고 부러졌다. 다시 2시간 반을 운전해서 갔다. 여전히 아말감으로 인해 이빨이 약해져서 그렇단다. 여간 미안해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임플란트 비슷한 것을 해 주었다. 쇠심을 박고 거기에 가짜 이빨을 만들어 잇는 방식이었다. 자신의 잘못이라며 재료비만 받았다—50불 정도. 그런데 그것이 체 안정도 되기 전에 다시 무언가가 똑하고 부러졌다. 다시 2시간 반을 운전해서 갔다. 이번에는 아예 뿌리 저 깊은 곳이 부러졌단다. 아말감이 뿌리까지도 삭게 했던 것. 자기가 잘 못한 것도 아닌데, 여간 미안해 하지 않았다. 어쨌든 자기가 잘 못된 치료를 제안해서였다면서 이번에는 반영구적인 브리지를 무료로 해 주었다. 얼마가 드는지 아직도 나는 모른다. 다만 그가 한 말은 평생 A/S를 해 주겠다는 말이다.
어찌 그런 크리스챤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브라더 디튼에 대한 신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신뢰는 곧 시험에 들었고 나는 그 시험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정확히 언젠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1-2년 정도 뒤의 일이었을 게다. 내가 한국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고질적으로 시큰거리는 어금니가 있었다. 그래서 왼쪽으로만 씹는 버릇이 있을 정도였다. 최소한 10년 이상 된 증상. 그저 참을 만 하던 것이, 점점 더 심해지더니 어느 때부터인가는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시큰거리고 심지어 아프기까지 했다. 브라더 디튼에게 갔다. 엑스레이 등 모든 진단 수단를 동원해서 원인을 찾아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래서 진통제를 좀 받아서 일단 돌아왔다. 그런데 갈 수록 심해져 이제는 항상 인상을 쓸 정도가 되었다. 다시 가서 조사를 했지만 이상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너무 아픈데. 이빨이 어떻게 돼가고 있냐고 묻는 브라더 디튼을 소개시켜 준 브라이언에게 잘 안 되고 있다면서, 내 속마음을 말했다: “이젠 디튼을 치과의사로서 신뢰할 수 없어.” 살던 곳 터줏대감 한분에게 물어 수십년을 치과를 해오고 있다는 의사에게 갔다. 이빨에 금이 갔으니, 크라운을 해야 한단다. 진단비를 제외하고도 금액이 장난 아니다. 시작하기 전에 더 신중하게 알아보기로 했다. 애틀란타에 올 기회가 있었다. 혹시 의사소통의 문제때문이었나 싶어 한국 치과에 갔다. 첨단 엑스레이가 있다면서 그걸로 조사하면 알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다만 이빨에 금이 간 것은 아니니 크라운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분명히 말해 주었다. (그러고 보면, 동네에서 오래 비즈니스를 한다고 무조건 믿을 건 아닌 것 같다). 통증이 심해져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는 비록 신뢰할 수 없었지만 닥터 디튼에게 가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너무 미안하고 난감해 하던 브라더 디튼의 강아지 같이 선한 표정과, 그의 그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불신하던 나의 마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애틀란타의 한국 치과에 가서 검사를 받은 것을 말했다. 그 병원이 진단에 이용한 엑스레이가 ‘최첨단’이라는 것을 누차 강조하면서. 디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영어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엑스레이가 현재 이 세상에 나온 치과 엑스레이 중 가장 고해상도이고, 그 엑스레이는 오래 전에 우리도 쓰던 것이다.”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안 믿는다는 말이 그 때의 나를 두고 한 말이다. 마음에 불신이 들었으니 어찌 그의 말을 신뢰했을까? 참 한심한 내가 아닌가?
잠시 후 디튼이 매우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하고 정말 하고 싶지는 않다고 하면서, 이빨에 작은 구멍을 뚫어서 이빨 속을 조사해 보는 방법을 설명했다. The last resort(최후의 수단)이란다. 통증에 시달리던 나는 순순히 응낙했다. 마취를 하고 드릴로 작은 구멍을 뚫던 디튼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Minku, your teeth is very very sick (네 이 빨이 정말 안 좋다).” 그는 뭔가를 강조할 때, very very를 쓰는 귀여운 버릇이 있었다. 설명인 즉슨, 이빨 안쪽이 완전히 망가져서 구멍이 뚤리자마자 피가 솟구쳤다는 것이다. 물론 신경은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고.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정밀 엑스레이로도 알 수가 없었던 것. 이제는 알았다는 듯이, 루트 커넬이라는 치료법을 설명해 주면서, “내가 지금까지 네 아픔을 찾아내 주지 못했으니까, 모두 무료로 해 주겠다”고 친절하고 미안해 하는 태도로 말했다. 그 치료는 이빨 내부의 모든 신경을 긁어내고, 레이저로 혈관 등을 지져 막고, 어떤 물질로 그 안을 채운 뒤, 크라운을 씌우는 것이다. 엄청난 ‘공사’다. 상당히 비싼 시술일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 가격이 얼마였는지조차 모른다.
치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와 아내는 부끄러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앞만 보며 운전만 했다. 브라이언에게 찾아가서 제발 내가 “디튼을 치과의사로서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한 말을 잊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것을? 정말 부끄럽고 미안하고, 하나님 앞에 죄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디튼에게 말하고 용서를 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만, 마음 속으로, 기도로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 몇번이고 그렇게 귀하게 배운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겼다.
그 뒤로 지금까지 디튼은 우리 가족의 이빨 치료를 모두 무료로 해 주고 있다. 온 가족의 정기 클리닝 및 검진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문제들을 아무 소리 없이 모두 무료로 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항상 하는 말은, “이렇게라도 전도자의 가족을 도울 수 있어서 영광”이라는 말이다. 신학을 마치고, 1년간 인턴을 할 때였다. 그는 내 앞니에 눈에 띄는 틈을 막고 싶으면 말하라고 했다. 또 무료로 해 줄 것이 분명해 염치가 없는 일이었지만, 아내의 권유로 하고 싶다고 말을 했다. 앞니가 벌어져서 상대방의 주의를 불필요하게 끈다면 전도와 설교에 도움에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치열교정(brace)이다. 이빨 전체를 하는 것이 아니고 앞니만 하는 것이어서 한 1년이면 족하다고 했다. 비용은? 이번에도 무료다. 나중에 간호사가 말해 주는데 (의사가 우리 가족을 그렇게 대해 주니, 간호사들도 우리를 무슨 귀빈 대접하듯 한다) 내게 쓰는 재료들이 미국에서 가장 좋은 것들이란다. 심지어 아이들이 하듯이 내가 원하는 색깔도 선택하라고 한다. 그분들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면 대할 수록 그를 불신했던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은 더욱 더 나를 괴롭혔다.
시작 한 후 1년 뒤 마침내 지금과 같은 고른 치열을 갖게 되었다. 하기 전에는, 과연 큰 차이가 있을까 했는데, 외모에 많은 차이를 정말 느낀다. 이빨만 좋아진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몇년이 지나 나 자신도 그 전보다는 성숙해졌는지, 이제는 디튼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나는 장문의 글을 썼다, 디튼과 간호사들은 물론 디튼의 친구들이 읽을 수 있도록 영어로. 어떻게 내가 그에 대한 신뢰를 잃었었는지, 내가 그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말을 했었는지, 내가 그것을 얼마나 부끄럽게 생각해 오고 있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튼의 사랑은 어떻게 변함이 없었는지를 5편의 글을 써서 브라더 디튼이 자주 방문하는 내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의 많은 친구들은 물론, 그도 댓글을 남겼다: “너의 겸손함에 감사한다. 너는 하나님을 위해 네 나라를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다만 나는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했을 뿐이다.”
나의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브라더 디튼의 선행을 알리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크리스챤은 어때야 하는 가를 삶으로 보여 준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디튼과의 그 사건이 가르쳐 준 귀중한 성경적 교훈이 있다. 그것은 크리스챤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7). 우리는 사람을 믿다가 조금이라도 우리 생각과 다른 모습이 보이면 쉽게 부정적인 생각을 품는다. 물론 정말 배신을 당할 때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적지 않은 경우는 지레 짐작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실망감을 품는 것이다. 내가 브라더 디튼에게 품었던 마음이 바로 그런 전형적인 경우다. 브라더 디튼은 나의 그에 대한 불신을 알아챘든 못챘든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전과 다름없이 온 믿음과 사랑으로 대해 주었다. 마침내 내가 나의 잘못을 알리고 사과를 표현했을 때도 나를 이해하고 오히려 나의 고백가 사과를 감사하게 받아들여 주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디튼과 같지 않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린 것이 엄청난 상처를 주기도 한다. 심지어 그로인해 인간관계가 파괴되게도 한다. 자녀가 사춘기를 지내고 있거나 지낸 부모들은 잘 알 것이다. 부모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녀가 눈치채게 될 때 그 자녀는 삐뚫어져 나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게 한 번 망가진 신뢰관계를 회복하기는 실로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한 경우도 없지 않다. 특히, 상대방은 내가 자신을 신뢰한다고 믿고 있는데, 진정으로는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이유로든 알게 될 때, 그 상대방이 받을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상처뿐이라, 그 상대방도 더 이상 나를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신뢰하는 듯 가식적으로 나를 대할 것이다, 내가 그 사람에게 그렇듯이. 이건 크리스챤이 만들어 나가야 할 인간관계는 커녕 건강한 인간관계도 아니지 않은가?
뭐 그럴 수도 있지 않냐고 말하는 크리스챤들도 많을 거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용해 보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하나님 믿습니다,” “주님 믿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진정으로 믿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자. 우리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받을 상처를 생각해 보라.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시고, 우리가 당신을 믿는다고 믿으시고 구원을 주신, 우리 주님께서 실제로는 믿는 척 할 뿐 믿지 못하는 우리를 보시면서 아파하실 마음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면서도 온전히 믿지 못하여, 늘 돈과 물질을 더 많이 더 많이 축적해 놓으려 탐욕을 부리고, 주님께서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실 거라고 입으로는 믿는 척 말하면서 늘 세상적으로 성공해서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려고 아등바등 하는 마음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회개하고 그런 불신으로부터 돌아선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해하고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망령된 불신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항상 마음 한 구석에 그것을 가지고 살고 있다면 어찌 될까? 그래서, 그런 불신으로부터 나오는 우리의 태도가 은연 중에 우리가 사랑해야 할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어찌 될까?
신뢰가 없이는 사랑도 없고 (고린도전서 13:7) 사랑이 없이는 구원도 없다 (13:1-3). 따라서 사랑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 (13:8). 구원의 완서을 향해 나아가는 크리스챤은 그 누가되었건 상대방을 ‘끝까지’ 믿어 주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위한 우리의 믿음을 어떤 경우에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설사 우리의 믿음이 배신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가 지레 부정적이 되어서 먼저 마음을 돌이켜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이유로든 하나님께서도 신뢰를 버리시는 분이었다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해 나타내신 사랑을 보자. 끝이 없는 사랑이다. 사람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지만, 그분은 그들에 대한 사랑을 눈꼽만큼도 돌이키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그들을 위해 마지막 숨을 쉬실 때까지 기도하셨다 (누가복음 23:34). 그리고 스테반 집사가 주님의 그 사랑을 그대로 따랐다—그는 진리를 말하는 자신을 돌로 쳐죽이는 자들의 용서를 위해 죽기 직전까지 기도했다 (사도행전 7:60). 주님을 따르는 우리, 즉 크리스챤의 사랑도 그래야 한다. 크리스챤은 차라리 속고, 차라리 손해보고, 차라리 바보가 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6:7).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이고 이것이 구원의 상을 받는 길임을 잊지 말자 (마태복음 5:11-12). 브라더 디튼은 바로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2: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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